우리 속의 돼지에 관한 기담과 어쨌거나 슬픔에 관한 질문들
- 조항록 시집 『나는 참 어려운 나』
등단 후 30년 동안 남다른 언어 감각으로 시를 조각하고 있는 조항록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참 어려운 나』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67번으로 나왔다.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조항록 시인은 이렇게 썼다. “말과 글에는 시제가 있다./ 삶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의 삶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삶의 시제가 뒤엉킬 때마다/ 나는 표정을 지우고/ 나는 가끔 허공에/ 시를,/ 썼다.(/ 쓴다./ 쓸 것이다.)”
이번 시집에 관하여 조항록 시인과 인터뷰를 했다. ‘나는 참 어려운 나’라는 제목만큼이나 시집을 읽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고, “삶의 시제가 뒤엉킬 때마다 표정을 지우고 허공에 시를 썼다”는데 아무래도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간략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리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시집은 일상의 통속과 삶의 순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것과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것, 달라져야 하는데 달라지지 않는 것과 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달라지고 마는 것에 관한 제 나름의 관찰기라고 할 수 있지요. 인생의 진실은 서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 편의 기승전결이 아닐 것입니다. 단 한순간의 분명한 사실과 단 한 줌의 틀림없는 감정, 다만 그것들의 퇴적이 인생의 본색 아닐까요? 어쨌거나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앞뒤 없는 하룻밤의 꿈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허공의 심상을 응시하며 『나는 참 어려운 나』에 차곡차곡 음각했습니다.”
“이번 시집이 누군가에게, 잠깐이나마, 강물 속 물고기의 비늘에 닿는 햇살처럼 삶의 비의를 반짝이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유행의 유혹에서 벗어나 정제된 이미지의 발현을 이루려고 힘썼습니다. 나아가 정제된 이미지로 시를 짓되, 그것이 작위와 허영에 빠져드는 강박을 경계하려고 애썼습니다. 인간의 삶에 당연히 이래야 한다거나,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그저 정색하지 않고 풀어놓는 한 편의 이야기가 시로 완성될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또다시 실패했을지라도 말입니다.”
끝으로 조항록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소 통속적인 질문에도 그는 성실히 대답을 해주었다.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는 작가의 숙명을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시의 정의도 그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열병처럼 앓게 되는 시, 어쩔 수 없는 고백 같은 시, 감추려 해도 드러나고야 마는 시. 그런 시들이 제가 펴내는 시집 『나는 참 어려운 나』를 저녁놀 저미듯 붉게 물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환멸의 시간이 용서의 오늘이 되고, 그리움의 통증이 파문 없는 내일이 되는 소박한 기적이 일어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습니다.”
시집의 해설을 쓴 황치복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을 “나를 찾는 여정, 혹은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 명명하면서 이렇게 평한다.
“조항록 시인은 시집 『지나가나 슬픔』을 비롯하여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그리고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등 다섯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시집이 시인의 여섯 번째 결실인데 그동안 시인은 현대인이 처한 사회적 삶의 조건과 실존적 삶의 곤경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사색을 펼치면서 그것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담아내왔다. 또한 서민들의 신산한 삶의 모습이 주조를 이룬 시인의 시편들은 비애와 우수의 정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시집은 조항록 시인의 작품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시적 주체의 본성과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비롯하여 그것을 둘러싼 세계Umwelt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문제의식이 지배하고 있기에 이 시집에서는 시적 사유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아마도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사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집으로 기억될 듯하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란 정동의 생성이나 이미지의 창출이라기보다는 시적 사유의 향연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완강하게 사유의 길을 따라서 시상의 행로가 전개되고 있다.”
이번 시집을 편집한 시인 박제영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그가 맡긴 원고를 살피다가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던 오바 요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참 어려운 나〉는 돼지우리라는 삶의 공간과 돼지우리를 살고 있는 우리 속 돼지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도무지 부조리한 삶, 도저히 맥락 없는 미스터리한 삶의 본색에 관한 질문들이다. 삶은 결코 기승전결이 논리정연하게 서술되는 서사가 아니라는 자신의 고백을 증명해 보이면서, 개별적이고 공시적인 사건(사실)들을 보편적이고 통시적인 개념(진실)으로 묶어버리는 식자들과 식자연하는 자들을 향해 사기 치지 말라며 멋지게 잽을 날리기까지 한다. 돈오점수라는 돼지들, 맹목이라는 돼지들, 지성과 회의라는 돼지들, 이율배반과 자가당착에 빠진 돼지들에 관한 기담(奇談)과 어쨌거나 슬픔에 관한 질문으로 가득 찬, 수선할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세하게 직조된 그의 문장들을 나는 과연 끝내 수선할 수 있을까? 수선을 끝낸들 독자들이 과연 끝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겠다.
이유 따위 묻지 말 것
사랑이 일종의 가설일 수 있으나
절차를 따지며
자료를 들먹이며
사랑의 실존을 모르는 척하지 말 것
모든 변절이 가능한 세상에서
때로는 죽음마저 믿을 수 없는 것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지
사랑은 아무 근거 없이
사랑으로 확인되는 것
나는 사랑한다, 라는 명제에서
단 하나의 결심은 출발하고
실험을 시도해도
증명을 요구해도
단 하나의 결론은 여기에 존재하는 것
- 「연역적 사랑」 전문
시집 『나는 참 어려운 나』를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삶의 행간이 다만 저녁놀처럼 붉어지기를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