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권문세가의 땅에서 자란 개화의 씨
북촌은 청계천 위,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사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 동네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곳이니 주거지로 최적이었는데, 사대부의 직장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임금의 공간인 궁궐과 사대부의 직장인 육조가 인접한 직주근접의 장소이기도 했던 까닭에 권문세가의 집이 많았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북촌에는 큰 필지를 가진 대갓집이 많았다.
_14쪽에서
‘뜨는 동네’. 북촌을 소개하는 어떤 글에서 북촌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쓴이는 북촌에 왜 유명 브랜드들이 상점을 내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지 이야기하는데 “남산타워, 창덕궁, 원서공원 등 북촌 풍경이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고 한다.
북촌하면 많은 사람이 검은 기와지붕을 올린 한옥을 떠올린다. ‘북촌=한옥마을’과 같은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옥만큼 꽤 큰 규모의 양옥도 많다. 고층 아파트가 없을 뿐이지 한옥, 양옥, 다세대·다가구주택 등 우리나라 주택 양식 전시장과 같다.
《가회동 두 집, 북촌의 100년을 말하다》의 저자 안창모는 “권문세가의 땅이었지만 개화의 씨가 자라던 곳”이라고 말한다. 항상 새로움이 시작되던 곳이라는 것이다. 신흥사대부가 살던 곳이었으며 조선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홍영식이 살았고 개화사상가 박규수의 집도 있었다. 이들이 살던 터에는 학교가 지어지고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문을 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윤택영, 민대식, 이재완, 한창수, 송병준, 이기용, 박제순, 한상룡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름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대상지인 가회동 두 집이 있던 가회동 79번지 일대는 천도교 4대 교주인 박인호와 3대 교주인 손병희 소유의 땅이었다. “조선말 권문세가와 종친의 거주지였던 북촌에 동학을 이은 천도교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는 장”(28쪽)이었다.
1915년과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지형도에서 확인되는 이름은 대부분 종친이거나 조선말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로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정된 사람들이다.
_23쪽에서
북촌은 권문세가의 땅이었지만, 개화의 씨가 자라던 곳이기도 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양 궐 사이에 있는 북촌은 우리 역사에서 항상 새로움이 시작되던 곳이었다. 조선을 연 신흥사대부가 살던 곳이고, 조선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살았고, 박규수와 홍영식도 살았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외국으로 망명한 김옥균 집터에는 관립한성중학교가 설립되어 인재양성의 터가 되었다. 홍영식의 집안은 갑신정변 후 멸문지화를 당했고 집터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헌법재판소의 일부가 되었다.
_26쪽에서
북촌에는 전쟁의 흔적도 남아 있다. 북촌로.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제는 공습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소개도로(疏開道路)를 계획한다. 기존 길은 넓히고 큰 땅 사이에 큰길을 새로 만들어 공습으로 인한 화재가 인접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으로 폭 20~50미터에 이르는 도로이다. 당시 일제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정확히 둘로 나눈 곳에 기존 도로를 폭 20미터로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다행히 일본이 패전하면서 도로 확장은 진행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촌살리기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일제시기에 그은 도로 계획선을 따라 왕복 4차선 도로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북촌로이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집이 철거되고 땅이 잘려나갔다. 그래서 북촌로의 서쪽에는 북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축대 위에 얹힌 한옥이 줄지어 있게 되었다. 또한 북촌의 한옥 보존 운동이 성과를 거두면서 북촌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을 상대로 한 크고 작은 상점이 많아졌는데 마당을 향해 열린 한옥을 도로를 향해 열고 대문간을 없애게 되었다.
전시체제에 그어졌던 소개도로 선은 경제개발기를 거치며 도시계획 도로 선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행되지 않았던 소개도로에 기초한 북촌로 확장이 1988년의 서울올림픽도 끝나고 북촌살리기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느닷없이 시행되면서 북촌로는 왕복 4차선이 되었고 오늘의 북촌 풍경을 만들었다.
_17쪽에서
《가회동 두 집, 북촌의 100년을 말하다》는 가회동의 잘 지은 두 집의 변화 과정과 함께 두 집이 자리한 북촌, 가회동의 변화와 의미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물리적으로 보존된 북촌을 ‘바라보는 대상’을 넘어 북촌 안에서 북촌이 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미학을 즐기고 내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219쪽)며 가회동 두 집의 의미를 이야기를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