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해 집도 차도 팔고 히말라야로 떠날 필요는 없다
침묵으로 고요해질 때만 만날 수 있는 삶의 비밀이 있다. 그렇다고 삶의 비밀이란 게 특별하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 디르크 그로서의 말처럼 그것은 매일의 사소한 순간들에 있다. “친구와 말없이 있는 순간이나, 정원에 날아든 새들을 바라보는 순간, 낯선 사람과 대화하다가 공통점을 찾는 순간, 반려견이 나를 온전히 신뢰하고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는 순간 같은……”
그런 순간을 오롯이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몸과 마음이 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에 깃든 영성에 대해, 일상의 한가운데서 신비주의자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독일의 영성가이자 작가, 강연가, 음악가인 디르크 그로서는 그러나 정작 ‘신비주의Mysticism’라는 단어가 맘에 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신비적인 태도는 ‘무슨무슨 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신비주의는 “매 순간이 지닌 성스러움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적인 길이지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믿고 따르는 일 혹은 종교 교리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뜨는 것’이며, ‘삶과 또 세상과 사랑에 빠지고 또 빠지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 모든 사물과 사건에서 ‘신성’을 보고, 그 신성이 자신의 내면에도 똑같이 존재함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지금 순간, 지금 여기’에서 고요히 그 신성 속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과 하나임을 알고,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온갖 불완전한 것들에서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며, 그 결과 내면 깊은 곳에서 늘 자유와 기쁨, 행복을 발견한다. 그렇게 삶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오해하듯이 신비주의는 현실 삶에 눈을 감고 먼 이상향만 추구하는 반反속세주의도 아니고, 저 하늘 너머의 초월적 신을 찾는 종교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거부하고 혼자만 아는 지식에 탐닉하는 비밀주의적 태도, 혹은 초자연적 현상과 그것을 부리는 기술을 익히는 데 관심하는 오컬트 등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해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집도 차도 팔고서 히말라야 같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바로 지금 자신이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 속의 모든 것에서 ‘변장한 신들’을 알아보고 또 만나는 안목과 방법을 기르고 닦을 필요가 있다.
동서양의 여러 신비주의 전통과 명상에 조예가 깊어 관련 책들을 쓰고 강연을 하고 신비주의 명상 공동체에서 활동하기도 한 저자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신비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기존의 전통 종교들과 신비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하며, 신비주의 정신에 따라 ‘지금 여기의 삶’을 사는 것이 어떻게, 왜 우리 삶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드는지, 또 신비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가는 데 명상이 어떻게 도움이 되며, 어떤 명상법들이 좋은지까지, 여러 신비주의 교사들이 남긴 말과 행적은 물론이고 자신의 일상 속 경험들도 곁들이며 친절하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 즉 진정한 자신과 일치하는 것, 그것과 하나임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의 원천이고 강이고 바다이다. 이것이 신비주의의 열매이자 뿌리이고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 다른 모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들 모두가 서로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의지하고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신비주의이다.”(이 책, 〈그저 작은 빛이 되라고?〉 중에서)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 불확실하고 자유로운 길
먼저 신비주의는 기성 종교와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신비주의는 어떤 종교도 아니고 자학이나 고행이 수반되는 신조도 아니며 단지 세상과 당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경직된 종교적 구조들을 기꺼이 뒤로하고 본질에 더 집중”하는 것이 신비주의라는 말이다. 물론 사막의 교부나 수피교도, 도교의 구도자, 선불교 스님, 동유럽의 하시디즘 신자, 힌두교의 방랑 수도자, 그리고 중세 유럽 수도원의 신비주의자 등 기존 종교 전통 속에도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어리석고, 단순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위험하고, 불경하다’는 이유로 그 종교 체제 밖으로 쫓겨났거나 스스로 그곳을 박차고 나온 변방의 사람들이다.
신비주의가 전달하는 신의 이미지도 기성 종교들에서 말하는 신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저 하늘 위에서 당신의 이른바 잘못들을 큰 장부에다 조목조목 적어놓고 적당한 때 그 죄를 묻는 근엄한” 그런 분이 아닌 것이다. 흰 수염을 날리는 ‘전지전능한’ 가부장적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두루 작용하는 원칙이자 모든 존재들이 태어나는 근원, 노자가 말하는 도道, 영화 〈스타워즈〉의 포스Force, 우리 폐 속의 숨, 진동하는 우주의 근본 리듬에 가깝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하고 헤아리거나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더욱이나 이 신(또는 신성)은 우리 누구나 스스로 자기 안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설령 “내가 예수를 존경한다고 해도 누구도 내게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즉 신성에 가 닿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지도 않는다. 그저 ‘진짜 당신’ 자신이 되어 살라고, 그럴 때 우리 안의 신성이 발현된다고(혹은 회복된다고) 말할 뿐이다. 그 점에서 신비주의의 진짜 이름은 ‘현존’, 즉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때 종교나 전통의 모든 이름표가 떨어져나간다.
이 이름표 없는 신비주의의 길은 곧 ‘자유의 길, 자유로 가는 길’이다. 기성 종교에서 제시하듯이 이미 아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길은 하나의 모험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최소한 처음에는 불확실성을 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불확실성이 신비주의에서는 중요하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눈이 되어야 본질적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아무런 보호막 없이 신비 앞에 설 때, 그때야말로 신비가 우리를 진정으로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신, 이론, 관념, 개념 들로 인해 머리가 덜 무거울수록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을 더 자유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이자 심리학 박사인 세안 오라이어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영적인 연쇄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네는 먼저 자네의 에고를 죽여야 해. 그 다음 자네 아버지를 죽이고, 그 다음 자네 구루(스승)를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네의 신을 죽여야 하는 거지!” 이 말은 에고도, 전통도, 스승도, 심지어 신에 대한 관념조차도 내려놓고 신비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라는, 순간에 순수하게 존재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저자도 언급하다시피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한 것도 ‘깨달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을 버리라는 뜻이라는 점에서 바로 이 신비주의의 길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누구에게 ‘나의 진리’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 되어 직접 자기만의 길을 탐색해야 한다.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말하듯 무엇에도 걸림 없고 무엇에도 꺾임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 “놓아주어라, 그러면 자유롭게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자서 어떻게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돌아보는 모든 것에서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유용한 도구는 바로 ‘명상’이다. 신비주의의 다른 이름이 곧 ‘현존’이라고 했거니와, 우리는 명상을 통해 온전히 ‘여기’에 있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다르게, 더 깨어서, 더 의식적으로, 더 공감하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현재 순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 우리의 ‘생각’이라면, 명상은 우리의 이 생각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현재 순간’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순간’에 존재한다는 건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에 마음을 여는 것, 즉 ‘내맡김’이다. 그 순간을 생각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명상이 “일상의 순간들이 보여주는 그 모든 커다란 비밀들에, 타인의 웃음과 눈물에 마음을 열게 하고, 소파를 물어뜯는 반려견 안에서 반짝이는 신성을 발견하게 해주며, 세상이 부드럽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쓰다듬는 모든 순간에 눈을 뜨게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나 이런 명상의 효과는 종교적 성향에 관계없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이 진정한 명상의 순간, 우리는 주변에 펼쳐지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이 순간에 우리는 삶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이 사랑에 빠질수록 우리는 더 열리게 된다.
“관상하며 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아이들의 눈으로 보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신처럼 본다. 다시 말해 언제나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고,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요약하면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의 길이다!”(이 책, 〈취한 듯 깊이 빠져들다〉 중에서)
이렇게 명상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요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생각으로 두려움이나 분노, 불안을 키우지도 않고, 자기의 중요성을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다. 그러자면 불안이 분노와 미움과 고통을 부르기 전에, 불안을 보고 알아차리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릴 때 우리는 파괴적인 분노나 미움 없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거나 할 정도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도, 세상과 세상 속 사건들에게도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줄 수 있게 된다. 진정 자유로우며, 옳지 않거나 충분하지 않거나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거나 하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난다. “놓아주어라, 그러면 자유롭게 사랑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선물 같은 메시지다.
한 가지 더, 이 책은 단지 신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는 연습인 ‘존재 명상’, 전통적인 가르침들이 자신에게 합당한지 아닌지 바라보는 ‘건강한 의심 명상’, 우리 안의 신비 속으로, 깊은 고요 속으로 내려가도록 돕는 ‘압분 명상’, 불편한 사람이나 상황도 실은 나와 연결된 일부임을 알아차리게끔 해주는 ‘타트 트밤 아시 명상’,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한 생명임을 상기시키는 ‘원 명상’, 우주에 대한 소속감과 어디서나 감사하는 마음을 계발하는 ‘우주 은총 감지 명상’, 바쁜 일상에서 잠시 쉼의 시간을 마련하고 삶의 리듬감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상에서 새 리듬감 계발하기’,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고 무력감에 빠질 때 우리의 은인들, 동행들을 기억하고 불러오는 ‘은인 떠올리기 명상’, 그리고 간단한 호흡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고요 명상’ 등 연습 방법들이 구체적으로 제안된다.
고요와 평화, 기쁨과 자유로 가는 길은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는 불확실성이나 외로움 같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더욱이 신비주의의 길에서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 길은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길을 스스로 내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애초에 한 발 한 발 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야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동시에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고 삶과 사랑에 빠지는 등 충분한 보상이 따르는 길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길을 걸으며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자유를 경험할 거라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비주의의 길 위에서 우리의 정신은 두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 첫째로는 인습, 개념, 이론, 사고 체계, 망상, 독단, 두려움, 자기 심판, 소외감에서 자유롭고, 둘째로는 사랑하고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고 삶을 신성의 끝없는 표현으로 경험하는 데 자유롭다. 이 길에서 우리의 정신은 내면의 가장 깊은 충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이 책, 〈오늘부터 쉬운 내리막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