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을 넘어선 정치의 시도, 타자를 향한 변이의 실험
민중미술은 통치가 배분한 규율화된 자리를 이탈하여 타자를 향해 변이하는 감각의 정치를 감행한 미술이었다. 변화는 처음에 미술장 내부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외부를 향했다. 미술가들은 반공주의적 국가 제도의 폐쇄회로와 모더니즘 추상에 갇혔던 한국 현대미술을 내적 금기에서 해방시키려 했다. 작가들은 다다,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과 전통회화를 혼융하는 포스트모던한 방법을 가져와 사회, 현실, 역사, 공동체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미술의 개념적, 제도적 규칙이 흔들렸다. 미술관 밖으로 한 걸음 더 나간 미술가들은 여러 공간의 규율화된 장소성을 변이시키며, 대중과 만나 그림을 공동 제작했다. 판화와 걸개그림은 이 과정에서 선택, 창안된 새로운 방법이었다. 국가와 자본이 규정한 정체성과 장소성을 벗어나 변이하는 체험은 미술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 회사원, 주부 등 시민 대중도 저마다의 규격화된 자리를 벗어나 미술을 매개로 계층적 타자를 만나 잠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미술가와 대중이 그림을 매개로 통치가 세워놓은 감각의 질서를 뒤흔들자 역사가 진보했다.
너와 내가 그려 나눈 작은 그림이 세상을 다르게 만든다타인을 향한 마음의 길, 민중
민중미술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술과 미술가의 존재 방식을 변이시키고 확장시킨 미술이었다. 미술은 미술관 안에 고요히 전시되어 수동적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그만두고, 미술관 밖으로 나가 성당, 교회, 공장, 거리, 광장에서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모아내는 미디어로 변이했다. 전시제도에 갇혔던 미술가는 이를 벗어나 다양한 시민들과 만나 평등의 유토피아를 담은 그림을 그려 걸었다. 대중과 미술가는 그림을 통해서 국가와 자본이 규정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의 미술사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단어 ‘민중’은 한국의 미술가와 대중이 규율화된 주체성을 이탈하여 타자를 향해 흘러가는 통로, ‘유로(流路)’와도 같았다.
미술사로 복원한 현장 미술, 민중미술의 새로운 역사 쓰기
이 책은 민중미술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과 풍부한 자료를 종합하여 다층적으로 서술했다. 미술장의 구조와 제도적 변화에 주목하고 일반인의 미술작업과 현장미술 활동을 폭넓게 종합하면서 미술운동을 재구성했다. 모더니즘 추상을 벗어나 방법과 주제를 혁신한 작가들의 전위적인 시도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민간 자본에 의한 제도의 재편과 이에 따른 미술장의 구조적 변동과 관련지어 분석되었다.
이 책은 천재적 작가의 일대기와 명작의 예술성에 집중하는 정통적인 미술사의 서술방식을 벗어나, 시민미술학교에서 처음 판각 기술을 배운 일반인들의 소박한 판화와 동료와 가족을 그린 노동자들의 따뜻한 걸개그림에 눈을 돌렸다.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진 현장 미술은 미술시장에서 유통되지도, 미술관에서 수집되거나 전시되지도 않는, ‘정상적인’ 미술의 타자들이다. 이를 복원하여 민중미술의 중심축에 놓음으로써, 이 책은 1980년대 미술운동이 작가와 대중들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동 가운데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했다.
민중미술은 오늘날의 미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이한 미술, 괴물 같은 미술일지도 모른다. 이 낯선 미술의 역사, 한국 미술 자신의 역사를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는 작업을 통해서 오늘날 닫혀버린 현재의 외부,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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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에서는 1983년까지의 전시장 미술의 흐름에 주목했다. 모더니즘 미학과 예술론에 갇힌 미술을 넘어서, 사회, 역사, 공동체를 주제로 삼아 인문학적, 사회학적 지성과 포스트모던한 미술의 방법으로 반공주의 국가의 감각적 규율을 해체시킨 회화사적 전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룹 ‘현실과 발언’, 작가 신학철, 그룹 ‘임술년’이 등장하여 도전적인 그림을 발표해 나갔던 과정이 민간 자본에 의한 미술장의 제도 변동과 연계되어 서술되었다.
제2장에서는 미술관 밖의 미술의 핵심적 매체인, 판화와 걸개그림이 등장한 과정을 소개한다. 광주 ‘자유미술인회’의 작가들이 시도한 시민미술학교에서 대중들은 검은 판화를 제작하면서 공동체적 만남을 기획했고, 미술동인 ‘두렁’은 현장 미술의 기원이자 집회의 수행성과 혼융되는 걸개그림을 창안했다.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이 결합되는 순간, 통치 권력이 이를 단속하였고 전선이 형성되었다 반공주의에 침윤된 관료와 평론가들은 정치 이데올로기 미술이라는 비판으로 몰아붙였다. 제3장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국가와 자본의 외부에 설립된 자율적 단체인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는 과정과 청년 작가들의 다채롭고 실험적인 기획전을 소개했다.
제4장에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여러 장소에 걸려 대중의 주체성을 변이시키고 변화를 추동시켰던 걸개그림과 벽화의 제작사례와 집회의 수행성을 추적했다. 평등의 유토피아가 담긴 노동자 걸개와 역사적 변혁의 주인공으로 재현된 대학생 걸개그림은 변이하는 주체성의 정점을 표현했다.
제5장에서는 민미협의 미술 활동을 살피면서,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의 갈등 및 현장 미술 내부의 방법적 대립 양상을 짚었다. 1987년 이후 전국적으로 지역미술단체들과 민미련이 설립되면서 시민 대중과 광범위하게 연계하는 미술가들의 활동이 일어났다. 여성주의 미술이 본격화되고 민중미술 해외전이 개최되면서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던 1989년의 비평적 정리작업까지 살펴보았다.
1990년대 전반, 통일과 노동을 화두로 통치의 경계를 뚫어내려 한 미술운동은 강력한 제재에 부딪혔고, 내적 경직화의 징후를 보였다. 통치의 단속 가운데 전시장과 미술시장으로 수렴되며 사그라들었던 미술운동의 마지막을 제6장에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