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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과 위진명사

죽림칠현과 위진명사

  • 콩이
  • |
  • 인간의기쁨
  • |
  • 2014-04-21 출간
  • |
  • 437페이지
  • |
  • 152 X 224 X 16 mm /648g
  • |
  • ISBN 9788996748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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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사상해방과 독특한 풍모의 신천지를 열다

『죽림칠현과 위진명사』는 한위漢魏 교체기라는 특수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형성되어 동진시대까지 이어진 지배계급 내부의 문화집단, 즉 위진명사에 관한 엄정하고 객관적인 보고서이다. 충칭사범대학교 교수인 저자 콩이는 수많은 전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재구再構하면서, 이를 통해 위진시대라는 격동기의 시대상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위진명사는 정시正始(위나라 제3대 황제인 조방의 연호) 연간인 240~249년에 활동했던 정시명사와 위진魏晉 교체기 전후에 활동했던 죽림명사, 서진시대에 활동했던 중조명사, 그리고 서진이 멸망한 이후에 활동했던 동진명사로 구분되며, 그 각각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정시명사

정시명사는 조조가 후한의 세가대족을 견제하고자 중소지주 집단의 인재들을 대대적으로 끌어 모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인재들이 몇 대의 조위曹魏 정권을 거치는 동안 신귀족층을 대거 형성함으로써 정시명사 집단이 등장하게 된 것인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상, 하후현, 하안, 왕필, 왕광, 이풍, 종회, 부하, 순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꾸고 우아한 행동거지를 보이고 의복과 음식을 좋아하고 청담淸談을 잘함으로써, 다양하고 다채로운 풍류를 보여주었다.
정시명사들이 남긴 가장 뚜렷한 자취는 ‘정시지음正始之音’이라 불리는 현풍玄風을 연 것으로, 이 시기에 현학玄學(형이상학)의 체계가 처음 만들어졌다. 후한의 지배계급은 명교名敎로 천하를 다스리는 데 힘썼으나, 황건적의 봉기 이후 명교는 더 이상 통치 기능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새로운 이론에 대한 시대적 요청 속에서 다시금 뜨거운 백가쟁명이 출현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법가法家와 명가名家, 그리고 도가道家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도가사상은 현실 유지를 원하는 지배계급의 요구(명교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활력이 되어줄 이론이 필요하다)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시명사 집단의 요구(급변하는 정국 속에서 이성과 내적 자유를 숭상하고 우주와 인생에 관해 성찰하고자 한다)에 모두 부합하여 유학에 도입되었고, 그 결과 위진 현학이 탄생한 것이다. 정시명사 집단은 『노자』와 『장자』, 『주역』을 바탕으로 하늘과 인간,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치밀하고 열정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위진 현학의 기본 체계를 확립했고, 이에 이르러 한위漢魏 이래의 사상적 흐름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위 교체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다양한 풍류를 드러내고 정시지음을 연주했던 이들 명사 집단은 결국 조씨와 사마씨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스러져갔다. 구세가대족의 영수인 사마의가 이른바 ‘정시지변’을 일으켜 조씨와 신귀족층을 궤멸시키는 가운데 수많은 명사들이 이 변고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죽림명사

죽림명사는 완적, 혜강, 산도, 유령, 완함, 상수, 왕융의 칠현을 가리킨다. 이들은 위진魏晉 교체기를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적대 세력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마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명교와 예제禮制를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환멸과 공포를 느낀 죽림명사들은 목숨과 도의道義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각자 서로 다른 사상과 행적을 이루게 되었다.
우선 혜강과 완적은 강한 저항심에 사로잡혀 명교와 자연을 첨예하게 대립시키면서 “명교를 넘어 자연에 맡기라”고 주창했다. 또 사마씨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정에 따르고 본성에 맡기는’ 삶을 영위하여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이 침해되지 않도록 지키는 데 힘썼다. 그런가 하면 유령과 완함은 왕조 교체기의 현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맞서 싸울 힘도 없어, 고통스럽고 모순적인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술에 취해 목숨을 보전했다. 산도와 왕융은 일찍부터 자연을 숭상했지만,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서 부귀와 현달을 애써 추구하다가 초심을 바꾸어 사마씨 진영에 몸을 의탁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변절을 변호하기 위해 명교와 자연의 구별을 애써 말살하면서, 명교와 자연은 같고 다름이 없다는 사상을 흥기시켰다. 마지막으로 상수는 별도의 길을 걸어, 정치적으로는 사마씨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학문적으로는 유교와 도교의 조화를 도모하여 ‘명교가 곧 자연’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혜강은 공개적으로 사마씨를 반대한 까닭에 ‘불효’라는 죄목으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완적은 비록 초심을 바꾸지는 않았을지라도 공격의 예봉을 거두고 자신의 뜻을 감춰 화를 면했지만, 울적하게 생을 마쳤다. 완함과 유령은 구애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취한 채로 살다가 꿈꾸듯 죽었다. 산도와 왕융은 벼락출세했지만 내심 번민이 많았다. 그리고 상수는 현학의 연구에 힘을 기울여 『장자주』를 씀으로써 한 시대의 현풍을 일으켰다.

중조명사

사마염이 진晉을 건국하면서(264년) 도읍을 중원으로 옮김에 따라 중조中朝 시기가 시작되었는데, 서진 사회는 문벌제도가 공고해짐에 따라 지배계급의 부패와 세가대족의 사치로 인해 정치와 사회의 기풍이 손쓸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런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중조의 선비들은 정시명사나 죽림명사에 비해 그 행동이나 풍모에 현격한 차이를 보였으며 그 수준이 매우 떨어졌다.
이때 곽상은 상수의 관점을 발전시켜 명교가 곧 자연이라고, 즉 ‘유위’가 곧 ‘무위’요 ‘조정’이 곧 ‘산림’이라고 보았는데, 그의 이런 이론은 문벌제도가 공고화된 서진에서 시기적절하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중조명사들은 그 이론을 방패막이로 삼아, 자리만 차지하고 녹을 받으며 제멋대로 즐기면서도 이는 다만 소요 방달하고 세속을 초탈한 모습이라고 내세웠다. 그리하여 그 부정적인 작용이 막대했으니, 그들 대다수가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 방달함이 이미 부패한 조정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방에서 전란이 일어남으로써 서진이 무너지고, 중국은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00년 동안의 분열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중조명사들 가운데 대체로 행동이 신중하고 예법과 규율을 잘 받아들였으며 청담을 잘했던 청담파로는 배해, 악광, 왕연, 유애, 왕승, 완첨, 위개 등이 있고, 다만 방달하고 매이지 않는 것으로만 유명했던 방달파로는 사곤, 왕징, 호무보지, 필탁, 왕니, 광일, 완부 등이 있다.

동진명사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그 잔여를 계승하여 양자강 남동쪽 일부에서 자리 잡은(317년) 후, 학문사상계에서는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들은 현학 명사의 영수인 하안과 왕필을 비판하고 청담과 방달함이라는 위진 풍교를 비난함으로써 명교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그리하여 유학과 현학을 함께 연구하는 추세가 하나의 학풍이자 시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학문 사조의 발전은 유학과 현학이 결합하여 새로운 학문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대신에 외래문화인 불교가 유학을 배제하고 현학 쪽으로 스며들어 현학과 융화되더니 끝내는 아예 현학을 대체하여 하나의 독립적인 사상체계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진명사들의 풍모 또한 크게 바뀌었다. 그들은 거침없는 방달함을 보이는 동시에 무실정신을 적극 강구했다. 그리하여 안으로 조정을 다스리고 밖으로 북벌에 힘쓰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은일 기풍이 성행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몸은 조정에 있어도 마음은 산림에 있다’는 사상을 받들었기 때문에 ‘조정에 있는 것도 은거요 저잣거리에 있는 것도 은거’라고 여겨 태연하게 산림과 조정에 출입했다. 아울러 청담에 열중했으며, 노장과 불경을 똑같이 청담의 주제로 삼았다. 특히 왕도와 유량, 환온, 사안 등은 동진의 권신으로,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명사의 풍류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뼈아픈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명사 풍류의 정취를 잃지 않으면서도 조정의 정치를 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위진명사, 그들이 살았던 시대

제1부
1 정시명사
2 정시명류
3 정시지음
4 정시지변

제2부
1 죽림명사
2 죽림명사의 서로 다른 길
3 혜강과 완적
4 산도와 왕융
5 유령과 완함
6 상수

제3부
1 중조명사
2 곽상
3 중조 청담파
4 중조 방달파

제4부
1 동진명사
2 조정의 권신과 풍류 재상
3 왕몽과 손작
4 치초와 은호
5 왕희지와 고개지

맺음말?위진명사의 역사적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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