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새긴 한국인의 초상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이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겼듯이, 그런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 육명심
사진가 육명심(陸明心)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마무리할 즈음인 1970년대말 ‘백민(白民)’ 연작을 시작했다. 예술가들과 밀착해 작업하면서 그들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고, 자연스레 이 땅의 사람들, 그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민초들을 제대로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훗날 ‘백민’과 함께 삼부작으로 불리는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으로 이어진다. 모두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층민들의 얼굴이 담겨 있지만, ‘백민’은 삼베나 모시옷 차림의 촌로, 박수와 무당, 사찰에 기거하는 스님, 아기를 업은 아낙네, 무뚝뚝하게 앉은 노부부 등, 우리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1980년대의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백민’ 시리즈는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마지막 모습을 증거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2011년 동명의 사진집으로 출간되었던 『백민』이 일부 사진의 추가 및 교체, 새로운 판형과 디자인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윤세영의 글 「이 땅의 사람들, 백민으로의 귀환」과 전문 영문을 함께 수록했다.
시선의 정면성과 우회성
백민 작업의 실질적 시작이 된 첫 사진은 1979년 7월에 전북 고창에서 찍은, 거목의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표지 사진, p.133) 작가는 이 사진으로부터 ‘백민’ 시리즈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육명심이 인물을 담을 때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잘 드러난다.
우선 사진 속 인물의 정면성이다. 카메라에 무심한 듯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할머니와의 눈맞춤은 그 후 사진가가 카메라 앞에 선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정면성은 단순한 눈맞춤(eye contact)에 그치지 않는 내면과의 소통을 의미하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람객 또는 독자와의 눈맞춤으로 확장된다.
다른 하나는, 인물을 존재케 하는 현실공간에 중점을 두고 시간과 함께 주위 환경과 동화된 인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신의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할머니와 고목의 조화는 마치 일체를 이룬 듯 자연스럽다. 또한 ‘백민’ 연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착종교적인 분위기가 이 사진에서도 역시 감지된다.
한편, 이번 책에 새로 추가된 사진들에는 정면성에서 벗어난 사진들이 꽤 많다. 육명심 인물사진의 특징인 강렬한 시선을 느슨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정면성에서 더 나아가 우회적인 라포의 형성까지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모두 다른 곳을 보는 사진, 여러 명 중 한 사람만 사진가를 보는 사진, 너무 멀어 시선의 방향이 모호한 사진, 심지어 뒷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있다. 정면성이 깨진 사진을 의도적으로 함께 섞어 놓음으로써, 하나의 원칙에서 벗어나 시선이 어긋난 인물들과도 다층적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백민, 사진가의 자서전
백민 작업은 1980년대 전후의 민중미술운동과 시기상 겹친다. 육명심은 순수하게 ‘우리 것’에 대한 관심으로 백민이나 장승을 촬영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일치는 결국 시대적 흐름에 반응한 결과다. 그러나 그는 굳이 ‘민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진에 적합한 제목을 궁리했고 결국 ‘아무 벼슬이 없는 평범한 일반 백성’이라는 뜻을 지닌 ‘백민’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백민의 어감은 사진 속 사람들의 꾸밈없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이처럼 ‘백민’은 ‘우리 것’으로부터 시작하자는 작가의 의도가 가장 잘 반영된 작품으로, 일찍부터 우리의 흥과 소리, 토속신앙과 역사에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육명심만의 작업이다.
“작가가 이 책이 마지막 사진집이 될 수도 있다며 ‘백민’을 선택한 것은 백민이야말로 사진으로 쓴 자서전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땅의 사람들, 백민 말이다.”
- 윤세영, 「이 땅의 사람들, 백민으로의 귀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