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부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시에 거주하고 있는 루퍼트 넬슨(Rupert Nelson, 1931년생) 씨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3년 1월부터 1954년 2월까지 강원도 화천, 춘천 인근 최전방 포병부대에서 측량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전쟁으로 굶주리는 아이들을 목격한 그는 농업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 후 사우스다코타 주립대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농업선교사로 태국 북부 산악지역에서 30여 년간 일한 뒤 1996년 은퇴했다.
정건화(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2018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과정사상연구소 방문연구원을 지내던 중 클레어몬트시 필그림 프레이스 시니어스 타운에서 우연히 루퍼트 씨를 만났다. 루퍼트 씨는 자신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며, 당시 한국에서 찍은 컬러 슬라이드(코다크롬) 200여 장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여러 번의 만남 끝에 루퍼트 씨는 슬라이드 기증의사를 밝혔고, 마침 같은 연구소에 방문연구원으로 와 있던 한윤정 씨(전 경향신문 기자)가 눈빛출판사에 출판여부를 타진해 한국에서의 출판이 성사되었다.
슬라이드마운트로 보관된 컬러 사진은 총 240컷으로, 한국전쟁 마지막 해인 1953년과 그가 한국을 떠나는 1954년 2월 사이에 찍은 사진들이다. 이 책에는 이들 사진 중 일본에서 찍은 사진들과 비슷비슷한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제외하고 100여 장을 골라서 수록했다.
루퍼트 넬슨의 사진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그의 부대생활과 전방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다. 오클라오마의 포트실 훈련소를 떠나서 한국에 도착한 뒤 화천, 춘천 등지에서 1년여 동안 복무하고 다시 부산항을 통해 한국을 떠나기까지 군대생활의 여정을 볼 수 있다.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 버린 전방고지, 휴전선 구획으로 전방 병력(8사단) 소개하는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한국의 농촌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다. 루퍼트는 사우스다코타와 아이오와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농업과 친밀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한국의 재래식 농업은 흥미로운 소재였을 것이다. 모내기와 추수하는 장면들이 고스란히 그의 슬라이드에 담겼다. 셋째는 한국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다. 기차역에서 미군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아이들, 춘천의 시장 풍경과 천막학교, 서울 동대문과 시가지의 모습, 부산항 등을 사진에 담았다. 특히 아이들 사진은 전후의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특유의 천진함과 희망이 밴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휴전 전후(1953-1954)에 촬영한 루퍼트의 사진은 전쟁의 파괴와 죽음, 절망의 긴 터널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오는 한국인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이국인의 시선으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