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섬세한 일상 판타지
언제나 혼자 아침을 먹고, 철길 건너 다른 동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엄마가 더 좋은 학교라며 철길 건너 학교로 전학시켰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현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적극 반발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외로움과 결핍감을 달래는 방법은 규격화된 현실에 상상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전철역 역사를 알머리 거인이라고 한다든지, 지하차도를 비밀 통로라고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현장 학습 가는 날, 길이 막혀 버스가 지하차도 안에 서 있을 때 아이 눈에 바구니를 든 쥐가 보인다. 다른 아이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데. 현장 학습에서 돌아온 아이는 기어이 지하차도를 찾아 들어간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엄마가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던 그곳을. 그리고 그곳에서 일상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놀랍고 신비한 일을 겪는다.
환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오래 전에 베어 버린 당산나무 뿌리처럼. 지상에선 사라졌지만, 땅 속에 남아 있는 거대한 뿌리 말이다. 온 마음을 뒤흔드는 환상적인 경험은 아이에게 위안과 용기를 준다.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아이는 현실에 좀 더 튼튼하게 뿌리 내릴 힘을 얻었다. 어쩌면 환상은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겹쳐 있는 마음의 시공간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책으로서 하나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텍스트는 짤막짤막 분절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체는 간결하고 차분한 톤으로 일상과 환상의 경계선을 짚어 간다. 특히 만화의 칸 구성을 본문에 끌어들여 글과 그림의 화학적 결합을 도모했다. 그림은 모노톤의 연필그림을 주조로 하여 칸 구성, 펼침, 액자, 소컷 등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에 관여하며 작품의 시공간을 구현해 낸다. 이런 작업 방식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난 책의 스타일이란 무언인지 상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