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무의미에 고개 숙이는 그곳, 두고 온 그곳은 어디 갔나
세계적인 시인 고은의 신작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이 시집은 저자가 <허공> 이후 3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으로, 시 한편 한편이 모두 고여 있지 않고, 낡아가지 않으려는,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만큼 힘이 넘치는 시편들이 담겨 있다. 부당한 시대를 향해 화살이 되어 꽂히는 시를 써왔던 저자는 여전히 시대의 한복판에서 조금도 비켜서지 않고 시대와 맞선다. 우리가 오래 전 떠나온 그곳, 변방이야말로 우리가 두고 온 우리의 고향이며, 그곳을 통해서만 우리는 중심을 향해 비뚤어진 이 시대를 바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떨쳐내고 끊임없이 출렁이는 젊은 힘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표제시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태백으로 간다’, ‘어느 하안거’, ‘시에게’ 등 11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백지
시가 오지 않는밤
며칠째 무인폭격기 공습의 밤
카불 강 골짝
한꺼번에
두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파슈툰족 노인의 밤
오른쪽 다리 잃은
그 이웃집 굶주린 아이의 밤
피범벅이야말로 생인 밤
슬픔이란 알라란 얼마나 사치냐
얼마나 오랜 장식이냐
나의 백지 위에 시가 오지 않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