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성취한 가벼움과 애써 도달한 수월성으로 빚어낸 직접直接의 세계
유홍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저녁의 슬하』. 등단 이후 ‘독자적인 발성법으로 해체시와 민중시 사이에 새로운 길을 하나 내고 있다’는 평을 들으며 독자적인 발성법과 시세계를 구축해온 저자는 이번 시집을 통해 주석이 없는 ‘직접(直接)’의 세계를 보여준다. 얼마쯤 한쪽으로 비켜서서 옆을 사유하며 고단한 삶의 풍경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으로 고스란히 담아낸다. 쓸모를 향해 질주하는 세계의 불모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위로하는 ‘오후의 병문안’, ‘모래밥’, ‘인공수정’, ‘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폐쇄병동에 관한 기록
글씨를 깨알같이 쓰는 사람들이 긴 복도를 오가며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다
하루에 세 번 약을 먹으면
흐릿하게― 일식(日蝕)과
월식(月蝕)만이
진행되는 곳
여기는
절대로 한자리에 만나
머무를 수 없는
해와 달이
밤과
낮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토록 오래, 모여, 밥 같이 먹고 잠자는 곳
알아들을 수 없는, 알아들어서는 안되는
분절의 말들이
폐쇄병동 복도를 굴러다닌다
더럽다, 그만두자, 기록해서는 안되는
해와 달의
밤과
낮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이상 태양은 뜨겁지가 않고 더 이상 달은 차갑지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