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다!
오정국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파묻힌 얼굴』. <멀리서 오는 것들> 이후 6년 만에 펴낸 저자의 이번 시집은 물과 진흙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로운 어법으로 익숙하지 않은 무형의 세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정복되지 않는 잠재성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진흙을 주제로 한 연작시 ‘진흙들’에서 저자는 사물에 대한 다양한 묘사가 아니라 진흙 속에서 형태가 아닌, 보이지 않는 순간과 세계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눈밭을 달려간 기차 이야기’, ‘사막에서의 하룻밤’, ‘씹던 껌을 씹듯’, ‘그렇게 눈빛을 마주쳤으니’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내 눈이 아니라면
늙고 병들었으나, 이 몸 빌어먹지 않게 하는
등짐, 아직은 내 살가죽이 견딜 만큼, 견뎌서 옮겨지는
소금과 녹차, 차마고도의 달빛들, 오직
하늘을 나는 새와
하늘이 퍼붓는 빗줄기의
벼랑길, 내 발자국 소리에 나를 파묻으며 걷는
밤, 나의 주인은 나를 매질하여
늙은 몸을 부려 먹는 저를 자책하지만, 아직은
검은 눈을 껌벅이며 그 마음을 읽는다 내 눈이 아니라면
그도 앞을 볼 수 없으리라 나는 늙고 병들었으나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