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시간들의 집결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활발한 행보를 보여 온 정한용의 다섯 번째 시집『유령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한 저자의 이번 시집은 난징 대학살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5ㆍ18 광주와 아프간 전쟁 등 지구 곳곳에서 목격된 전쟁과 테러, 정치적ㆍ종교적 분쟁 등의 잔인한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무자비하고 일상적 폭력에 분노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우리에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타자로만 존재하는지 물음을 던지며, 공식 기록으로 남은 역사와 희생자의 절규하는 노랫소리를 대비시켜 비극성을 더하고 있다. ‘바다에 묻는다’, ‘새들의 노래’, ‘오늘도 무사히’ 등 45편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난민촌에서 온 편지
오늘은 반가운 비가 옵니다
1년 만에 내리는 비가 먼저 하늘을 곱게 씻어 내고
찢어진 막사 구멍에 실비를 뿌립니다
피난 오기 전 다친 이마가 덧날까 두렵지만
언덕에 작은 이랑을 흐르는 물줄기가 싱그럽습니다
삭은 옷가지들 때 절은 모포들
저녁에 햇살 나면 빨아 널 수 있을지
비 긋고 나면 내일모레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말들 하던데
우리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국경 너머
아직 소식 어둡습니다
어두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텐트 입구에 거꾸로 꽂아 세운 마체테 칼날에도
빗물이 흘러내립니다
후투의 피와 투치의 피가 하나로 뒤섞여
땅에 스밉니다
붉게 젖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