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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시

농경시

  • 조연호
  • |
  • 문예중앙
  • |
  • 2010-12-20 출간
  • |
  • 215페이지
  • |
  • 125 X 204 X 20 mm /304g
  • |
  • ISBN 9788927801610
★★★★★ 평점(10/10) |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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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우리 시의 진화를 이야기할 때 조연호를 빼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불가역적이다.
그의 출현 이후로 한국의 현대시는 조연호 이전과 조연호 이후로 나뉘었다.
다시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진화는 돌연변이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서 성공한 돌연변이는 새로운 시대에 창궐한다. 조연호는 한국시의 돌연변이다. 두 번째 시집 이후로 그는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신화적인 가계를 작성하고, 지상을 촘촘히 새겨 넣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완성하더니, 이번에는 천상을 게워낸 지상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에는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가, 문법과 비문법이, 고백과 발견과 예언과 권태와 찰나가, 그리고 우리가 알아왔던 모든 희로애락이 들어 있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문학적 형상물은 박상륭의 전 저작과 보르헤스의 알렙, 둘뿐이다. 우리 시의 진화를 이야기할 때 조연호를 빼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불가역적이다. 그의 출현 이후로 한국의 현대시는 조연호 이전과 조연호 이후로 나뉘었다. 다시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권혁웅(문학평론가)

어떤 형식의 초월도 가능하지 않을 때의 시쓰기란 무엇일까? 어떤 시인은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다시 절망을 낳는다고 했다. 다른 시인은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유희를 낳으므로 우리는 가까스로 위안받는다고도 했다. 조연호는 발꿈치 하나도 부양되지 않는 우리네 삶의 숙명을 백번 기술하고 천번 곱씹어 만번 너덜거리게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출구 없이 내부에 붙들린 이들의 숙명을 기어이 꿰뚫어보고야 말겠다는 가차없는 텍스트를 우리는 눈앞에 두고 있다. 어디로든 잠입하고 어디로든 빠져나올 수 있으되 우리를 기어이 다시 그 안으로 불러들이고 마는 이 니체적 마성(魔性)의 텍스트를……. 조강석(문학평론가)

▶ 『농경시』

2010년부터 중앙북스에서 새롭게 발간되는 ‘문예중앙시선’ 첫 번째 시집으로 조연호 시인의 『농경시』가 출간되었다. 『농경시』는 49개의 번호로 나뉘고, 174연으로 구성된, 단 한 편의 장시 「농경시」를 수록한 시집이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 『저녁의 기원』(2007), 『천문』(2010)을 발표해온 조연호는 고유의 시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시의 최전방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이다.
20,000여 개의 단어로 쓰인 장시 「농경시」는 의미론적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시어와 시어, 시행과 시행 사이에서 수수께끼를 풀 듯 의미를 찾아나서야 하는 지난한 과제를 독자에게 던지는 시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한국시에서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격렬함”을 품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시집에 해설을 덧붙인 문학평론가 허윤진에 따르면 낯선 어휘들이 산재하고 의미의 상식적 연결을 회피하는「농경시」는 “존재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불가능한 산종(散種)을 꿈꾸는” 시도, 우리말의 “사어(死語)나 폐어(廢語)가 된 부분들을 위한 인공소생술”과 같은 시도이다.
“당신은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되는 어떤 상태에 사실은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그들의 망설임이 끼어들어 있는지를 형태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할 따름입니다. 저는 당신을 언어의 복고풍 수집가, 여전히 방학 중인 언어채집가라고 부르고도 싶습니다. 우리의 현실 언어생활에서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단어들은 과연 당신의 시세계를 넘어,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최소한 당신의 시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기는 단어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겨울의 빈 들판처럼 휑뎅그렁한 사전을 펼치고, 그곳에서 다른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언어의 이삭을 성심성의껏 주워 모으고 있습니다.”(허윤진, 해설 「향과 재」에서)
『농경시』 출간을 앞두고 계간 《문예중앙》에서 나눈 대담에서 조연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국어로 쓰일 수 있는 만연체 문장의 여러 갈래를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완성은 문체의 완성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만연체의 여러 갈래에 대해 시도를 해봤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읽어봐야 의미를 알 수 있는 문장구조라, 짧고 간결한 문장이 대체로 선호되고 있는데, 시적 언어가 의미와 정보전달의 목적이 아닌 이상, 오히려 만연체가 더 중층적인 의미망을 형성하는 데 적합할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에서 되도록 길고 복잡한 문장을 고집해봤습니다. 물론 구조상 의미의 결락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결락된 부분에 또 다른, 혹은 방기된 다른 의미가 포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적용(適用)보다는 오용(誤用)을 택했는데, 그게 문법적 결함을 가져올 수 있지만, 더 넓은 정서를 머금을 수 있을 거라는 데 아직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김행숙 시인은 『농경시』의 “문장 하나에는 시 한 편의 가능성이 내장되어 있다”고 평했다. “시 한 편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 문장이 이어져요. 10행, 20행, 100행을.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또한 각각의 문장들은 상당한 문법적인 변형과 수사학적인 세공을 거쳐서 이루어져 있어요.”
다른 한편 한자어와 비문의 비율이 높은 『농경시』가 독자들에게 즐김보다는 버겁고 고통스런 독서를 강요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인은“감성에 의존해 글을 쓰는 방식은 편하고 아늑한 면이 있습니다. 체질적으로도 그게 더 맞고요. 그런데 이번 시집은 상대적으로 해야 할 말이 포함하는 세계가 거대해져서, 한 군데 파묻혀 조용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 건조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정보의 과잉보다는 논리의 과잉이 있어서 감각적인 측면이 줄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고요. 저도 느껴온 고민이었고 쓸 때 고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성과 논리는 양립이 힘들었습니다.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제가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작업 쪽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게 이번 시집의 경우는 여러 면에서 특수한 경우라고 말해두고 싶네요. 감성의 미가 있다면 문학 안에서 사유의 미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점과 함께, 감각적인 표현이 있다면 사유의 감각성 역시 문학 안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전의 텍스트들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농경시』를 이전의 변형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감각성으로, 그 자체 한 계열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거대한 미로처럼 보이는 장시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독자들을 위해 시인이 일러준 이 작품의 큰 골격을 요약하면 이것은 “어린 시절 거세, 할례 당한 사람의 기억과 그가 ‘선생’과 그의 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관계와 자신, 가족의 관계를 대비시키는 불투명한 이야기”이다.
허윤진은 『농경시』의 의미를 재구(再構)하는 의미의 망을 세 가지로 보았다. 동양 고전, 과학, 그리고 기독교. “사실 이 세 가지의 의미 영역은 어떤 식으로든 앎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양/서양의 대립도 존재하고, 고전/근대의 대립도 존재하며, 비-진리/진리의 대립도 존재합니다. 『농경시』에서 문맥을 낯설게 만들면서 등장하는 전문적이며 특수한 용어들은 대개 이 세 가지 영역 중의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산란된 단어들을 이런 의미 영역들 안에 분류해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단어들 사이에 느슨한 연관관계를 설정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매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계절』을 보면 당신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두 사유체계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조합은 매우 반어적으로 보이지만, 이 조합을 통해 당신이 짓눌린 자로서, 약하고 가난한 자로서, 당신을 구원해줄 것을 열망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신이든 이데올로기든, 당신에게는 버팀목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초월적인 신의 개입 없이도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감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면서, 기독교 문화에 근간을 둔 서구 문명부터 인간으로의 전회를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도 동양의 고전과 서양의 과학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고 현대의 상대주의적 불신에 보다 깊이 빠져들면서, 기독교의 비유체계와 어휘에 여전히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 같아 보입니다.”(허윤진, 해설 「향과 재」에서)
시인은 “이번 시집은 땅, 대지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전 주제, 혹은 주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동식물 모두를 포함하여 생명은 대지 위에 고기로서 동등하다는 것이 이번 시집의 입장인데요, 부패가 전제된 고기로서의 삶이 자기의 참혹을 확인하는 한편 희망에 의지해 밭을 일구고(노동하고), 그 땅에 결실 맺은 다른 삶의 참혹을 또한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우리는 그런 농경을 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제게 던지는 의문들입니다.”라고 말했다.
▶ 계간《문예중앙》2010년 겨울호(125호) 대담, 「미소무한 VS 거대무한」에서 시집『농경시』에 대해

농경, 부패하고 말 몸의 삶이 확인하는 참혹

조연호: 하찮게 들리겠지만, 저는 진지한 게 좋아요. 할 수만 있다면 하염없지 진지해지고 싶고, 또 그런 삶을 동경합니다. 제 교양이 속박하니까 그런 욕구가 강한 거라고 이해해주세요.
권혁웅: “자신의 삶을 희극으로 창궐해버린 자들”에 대한 경멸이로군요. 지금 말하는 비극은 사실은 이 시집 전체의 기획과도 관련이 있지요. 이런 기획은 사실은 세계를 언어 안에 이식하고 농경함으로써, 시 안에서 세계를 수확하려는 기획이거든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지요. 이 기획이 성공하려면 언어를 세계의 크기만큼 무한히 확장해야 하는데 아무리 멀리 가도 세계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세계란 건 경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의 시작과 끝, 다르게 말해서 바깥이 없는 유한이니까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비극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이 원래부터 위대한 비극, 위대한 실패를 예정하고 있는 셈인데요, 그 점에서는 대단히 영웅적입니다. 신을 이길 수는 없으나 투쟁하려는 의지만큼은 지지 않는 영웅 말이죠.
조연호: 그건 제가 볼 때 모든 시의 숙명이라고도 보여져요. 언어에 대해 믿을 것이 없는데도 여전히 철학자들이 개별언어를 가지고 전체언어를 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또 신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종류의 가상이 가상임을 깨닫고도 여전히 자기 안에서 신이 또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결여감정 같은 것 말이죠. 이런 종류의 끊을 수 없는, 끊기지 않는 숙명의 고리들이 계속 원환하며 뭔가를 만들어내니까, 그 자체가 이미 가상이고 없는 것으로서의 실체를 목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쓰는 자들의 공통된 통증이 아닐까요?
권혁웅: 조연호 시의 신은 그노시즘에서 말하는 하급신입니다. 자기가 지어진 존재인 줄을 모르고 자기가 세상과 제 자신을 지었다고 믿는 신이죠. 범인(凡人)이 운명을 신으로 여기고 거기에 굴복한다면, 영웅(여기서는 시인이라고 바꿔도 되겠군요)은 카르마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그 카르마는 누가 결정짓느냐고 묻지요. 따라서 모든 것이 의심과 전복의 대상이 됩니다. 가족들은 나를 찌르고 베고 버리는 존재이고, 신은 그 자신마저 버림받은 존재이고, 세계는 언어의 기계들로 유지되는 곳이고……. 그러니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언어를 만든다기보다는 세계를 버리기 위해서 언어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부서지고 망가진 폐허 위에서 어쩌면 진정한 세계의 실상이 얼핏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요. 한국시에서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격렬함,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막장의식이 있어요.(웃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성공적인 것 같습니까?
조연호: 걸어온 길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앞길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겠죠. 인간 삶이 이루는 환원은 생성과 소멸의 이분으로 가능하지만, 예술에서 그 둘은 동시적이고 양가적이기 때문에 더 넓은 둘레로 확장될 수 있지만 때문에 더 많은 결여를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길을 가진 사람에겐 역설적으로 더 적은 길을 선택할 권리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시가 의미적으로 닫혀 있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월이라거나 극복 같은 단어가 저의 단어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번 시집은 부피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나 전형적이진 못한 것이 되었는데, 당돌하다면 당돌하달 수 있는 부분이 도드라져 보이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웃음)
권혁웅: 독자들을 위해서 이 시집의 큰 골격을 일러준다면?
조연호: 실상은 시집 안에서 서사구조가 중요하진 않지만, 길어진 분량을 지탱할 뼈대가 필요해서 미약하나마 어떤 종류의 서사가 이번 시집에 혼재하게 되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거세, 할례 당한 사람의 기억과 그가 ‘선생’과 그의 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관계와 자신, 가족의 관계를 대비시키는 불투명한 이야기입니다. 할례는 어버이의 입장에서는 청결의 의미로, 아이에게는 떼어낸 살 조각 너머 육신 전체가 가진 불결의 의미로 서로 다르게 해석됩니다. 멀쩡한 살을 떼어내는 행위는 제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청결이지만, 제의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엄청난 고통일 뿐이고, 육체에 대한 부정을 고집하게 만듭니다. 이걸 좀더 확대해석하면 신이 제 형상을 빗대어 만든 인간의 육신은 신의 판단과 제의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될 것이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살인하지 말라거나 하는 계율들의 청결은 한편에서는 청결, 위생관념을 부정해야만 가능해지는 청결일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용서가 형성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말입니다. 할례를 통해 청결을 선고 받았지만 스스로는 그것에 대해 육체의 흠집일 뿐이라고 믿는 자에게 청결의 시작은 결국 불결의 시작과 같은 지점인 것입니다.
권혁웅: 시집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맴돈 생각은 ‘이 시집은 절종(絶種)의 형이상학이다’라는 거였어요. 할례라는 게 본래 상징적인 거세의식이잖아요? ‘너의 생명은 생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할례를 행함으로써 네 생명이 내게 속해 있음을 증명하라’는 신의 요구가 할례입니다. 그런데 이걸 뒤집어서, 신이 나를 잘라서가 아니라 내가 신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할례가 아니라 절종이 됩니다. 부모에게서도 잘리고 신에게서도 잘리고 언어에서도 잘리고 어떠한 곳에서든 떨어져 나온 자, 그러니까 절종한 자가 자기 오줌과 정액으로 파종을 하는 일, 이걸 저는 농경이라고 봤어요.
조강석: 그러니까 이 시집의 이미지 중에 제일 자주 나오고 강한 것 중 하나가 부종, 배농과 같은 건데, 곪고 썩는다는 거지요. 『천문』이 예컨대 초월 이전에 확장을 택한, 그러니까 또 다른 방식의 우주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심미적 탐구의 결과라면 이번 시집은 어떤 면에서는 그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땅에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내재적 초월마저 불가능한 세계에서 얘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곪는단 말이죠, 부종이 되는 것이죠. 내재적 초월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인간이란 대체 땅에 바짝 붙은 채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 말이에요.
조연호: 이번 시집에서 배농, 부종, 골종, 육종, 종양 등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거개가 고름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그것들이 제 안에서 어떤 상징인가 하면, 아직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지만, 피부 아래서는 상해가고 있는 단계, 내부에서 외부로 위험하게 팽창하는 단계, 결국 찢어내어 짜내야만 하는 단계입니다. 할례라는 것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핍한 인식의 어떤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실제 사물을 치환하여 소멸시키는 단계인데, 고름이 밴 살 아래쪽 역시 피부를 소멸시키지 않고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이라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단지 살의 잘라냄이 상처의 유무에 상관없이 임의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을 것인데, 존재의 질병이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스스로 불안정하고 결정불가능한 형태로 내던져진 한 점 고기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상처내기 위해, 곪기 위해 치유나 청결이 인간의 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제 글 안에서 선악과=부종인데, 열매=상처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따먹었다는 선악과는 신의 청결을 범한 죄의 원형인데, 그것을 씹는 순간 자기 몸의 수치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인간 인식에서 몸에 대한 자각이 생기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신의 과일이 부정되는 순간 인간의 과일이 탄생합니다. 신의 동산에서 쫓겨나 인간이 처음 한 일은 물론 농경이겠지요. 씨를 뿌리고 이제는 스스로 따먹을 수 있는, 먹어도 벌 받지 않는 과일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이미 죄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열매와 곡식은 항구적으로 질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사실상 가능한 것은 그런 종류의 순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에서 몸, 혹은 대지로 내려온 죄/용서의 그러한 역학관계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천문』과 『농경시』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적용(適用)보다는 오용(誤用)을,
의미가 결락된 곳에서 포착될 또 다른 의미를…


김행숙: 음, 조연호 시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조연호 시인이 쓰는 한자 어휘들 중에는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조어(造語)도 많고, 또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어려운 한자도 많잖아요. 이런 한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내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조연호 시인한테 있어 한자어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조연호: 결코 ‘자유자재’는 아닙니다.(웃음) 몇 년 따로 공부했어요. 아직 잘 모르지만, 한문의 매력은 뉘앙스의 비약성에 있는 것 같아요. 같은 글을 읽더라도 더 많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중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언어체계인 것 같습니다. 조사가 없으니까 세부적인 디테일을 읽는 자의 몫으로 돌리는 거죠. 그걸 달리 얘기하면 해석의 다양함이 존재한다는 거죠. 한자의 경우, 우리글에서 한자의 종속성은 상당하지 않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거의 대부분을 한자로도 쓸 수 있으니까요. 그 종속성을 저는 우리글의 장점으로 생각합니다. 어휘체계가 다른 두 나라의 언어가 한 자리에서 혼융되었을 때, 거기서 뉘앙스의 풍성함이나 언어적 시도에 있어 축복에 가까운 다양한 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컨대 한글이 글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조어를 만들기 힘든 구조라면, 한자는 글자 하나가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조어의 직조에 무리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한자 단어를 지금의 문장에 가져와 써도 그리 이상하지 않고, 사어화된 단어를 가져와도 한자를 읽을 수만 있다면 그 뜻이 무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 단어는 의미+의미의 중첩구조이기 때문에 상당히 함축적이면서 경제적입니다. 이 경제적 체계를 한글의 풍성한 뉘앙스에 섞는 일은 시인으로서는 복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강석: 그게 딜레마가 될 수도 있어요.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정도에서 한자들을 조합했을 때, 묘한 표현의 재미가 생겨날 수 있지만, 통상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들, 아니면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한자들을 결합시켜 시에 상당수 부려놓았을 때, 김수영의 구절 중에 있는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를 차용하면 한자가 많아서 걸릴 수도 있으니까.
조연호: 기본적으로 우리는 한자 세대지만, 우리보다 어린 세대일수록 한자 교육의 기회가 적었잖아요. 그런 게 딜레마겠죠. 읽고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면, 언어의 합의된 한계선이라는 것 자체가 무너지니까요. 그 점에서 이런 시도는 충분히 경계하고 조심스러워야 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김행숙: 어쨌든 저한텐 그런 점이 미적 효과로 다가오기도 해요. 조연호의 개성이 만들어지는 지점이기도 하죠. 조연호 시인의 낯선 한자어들은 시간과 공간을 희미하게 만들어요,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텍스트가 아닌 듯한 느낌을 주죠. 이를테면, 작가를 신라시대의 누군가, 중국 고대의 누군가라고 해도 그럴듯해요. 딱히 동양적인 정취만을 풍기지도 않지요. 독자는 고대 그리스의 어느 폴리스, 중국 고대의 농촌, 조선시대 어느 선비의 유배지, 중세시대 어느 수도사의 다락방 같은 공간을 떠올려도 좋을 것 같아요. 시간과 공간이 희미해지면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듯해요.
조연호: 의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김행숙: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조연호 시인의 문장에 대한 거예요. 다소 성급하고 거친 얘기긴 하지만 현재 우리 시단에 문체의 수준에 도달한 두 계열의 비문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가 김언류의 비문이고, 또 다른 하나가 조연호류의 비문이에요. 조연호 문체가 생긴 것 같거든요. 분명 매력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럼에도 때때로 그것의 미학적인 효과에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조연호 시인은 비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요.
조연호: 문체에 대해서는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완성은 문체의 완성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만연체의 여러 갈래에 대해 시도를 해봤습니다. 영어의 경우, 동사가 바로 나와서 앞부분만 이해하면 뒷부분은 크게 이해를 안 해도 되지만, 우리나라는 끝까지 읽어봐야 의미를 알 수 있는 문장구조라, 짧고 간결한 문장이 대체로 선호되고 있는데, 시적 언어가 의미와 정보전달의 목적이 아닌 이상, 오히려 만연체가 더 중층적인 의미망을 형성하는 데 적합할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에서 되도록 길고 복잡한 문장을 고집해봤습니다. 물론 구조상 의미의 결락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결락된 부분에 또 다른, 혹은 방기된 다른 의미가 포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적용(適用)보다는 오용(誤用)을 택했는데, 그게 문법적 결함을 가져올 수 있지만, 더 넓은 정서를 머금을 수 있을 거라는 데 아직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조강석: 만약 누군가 집요하게, 그래도 역시 비문은 여전히 비문이다 이런다면?
조연호: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글을 읽는 사람이 비문이다 난유(亂喩)다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허구적 작업이거든요. 예술은 그 자체가 이미 허구인데도 ‘하늘의 길을 너와 함께 걷는다’라고 썼는데, 누구와 비행기 타고 간 것 맞습니까, 라고 사실관계를 묻는 것과 똑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허구적으로 구성된 어떤 종류의 미적 가치를 가진 언어의 덩어리가 문학이라면 그것의 가치는 문법구조의 정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미성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혁웅: 위험한 발언인데요?(웃음)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문이 얼마나 의미를 정확하게 조율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말의 내부 규칙을 수락하면 문법에 맞지만, 그것을 어기면 비문이지요. 그런데 고의로 어기는 경우라면, 원래의 규칙과 어그러진 규칙 사이에서 의미와 뉘앙스와 음악이 발생합니다. 실상 거의 모든 음악과 뉘앙스는 정합성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에서, 그 일탈의 정도를 통해서 측정됩니다. 모든 의미 있는 비문은 내부적 규칙을 고의로, 그러니까 상대화하거나 이중문이 됨으로써 효과를 발생시키는 거죠. 문법의 규칙을 모르고 쓰는 비문들, 우리말에 서툴러서 쓰는 비문은 처음부터 미적이지도 않고 뉘앙스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조연호의 시가 품은 비문이 원래 문장과의 간격 속에서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김행숙: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새삼 감탄하게 된 것이기도 한데, 조연호 시인의 문장 하나에는 말하자면 시 한 편의 가능성이 내장되어 있어요. 그리고 또 시 한 편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 문장이 이어져요. 10행, 20행, 100행을.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또한 각각의 문장들은 상당한 문법적인 변형과 수사학적인 세공을 거쳐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천천히, 천천히 읽게 되지요. 아껴가며 읽게 돼요. 그런데 비슷한 강도의 문장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문장이 문장에 묻히는 것 같아요. 다음 문장을 읽으면서 그 앞의 문장을 잊어버리게 되는 상태에 빠지는 거죠. 천천히, 천천히 읽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어쩐지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들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흡이나 배열에 조연호 시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조연호: 자문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자적인 제 방식의 글쓰기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것의 딜레마가 바로 지금 언급해주신 부분일 것입니다. 허구이기 때문에 더더욱 클라이맥스가 존재해야 하는데, 제 글엔 클라이맥스가 없어요. 선천적이랄까 이전부터 줄곧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의 전체 덩어리와 색감을 중시했기 때문에 아마도 논리적 유추를 거부하는 불쾌한 독서감을 제공할 겁니다. 그걸 우회하는 방법은 글쓰기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인데, 중심보다 주변성을 중요하게 두는 지금의 방식을 바꿔야 할 만큼의 계기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글에 긴장이 느슨해지는 건 전적으로 제 문장력에 기인하는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 않겠습니다.
권혁웅: 저도 문장 하나하나마다 시 한 편이 들어 있다는 지적에 공감하고, 조연호 시의 그런 면을 오래도록 좋아하고 즐기던 독자입니다. 제가 제일 많이 뒤적거리던 작품은 『저녁의 기원』과 『행복한 난청』입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오면서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좀 메말라졌다고 할까. 버석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신화와 형이상의 구도를 차용하면서 기획 자체가 요구하는 것도 있었을 테고, 한자어와 비문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문장의 변화가 요구하는 것도 있었을 테지만, 이전의 독자 입장에서는 좀 버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글쓰기가 극단에 이르면 무의미 쪽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저는 무의미의 문학이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는 사람이고, 그래서 무의미에 최대한 근사해지는 의미까지가 글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이런 미분적 글쓰기는 독자에게서 가능한 한 멀어지려는 글쓰기가 될 위험도 있습니다. 어렵게 따라온 독자에게 ‘나 잡아봐라’ 놀이를 계속 강요하는 거죠.(웃음) 이런 글쓰기가 극단에 이르면 기호놀이처럼 보이게 됩니다. 일종의 보르헤스적 쓰기죠. 사전을 펼쳐서 한 단어, 다른 면을 펼쳐서 다른 단어, 또 다른 면을 펼쳐서 다른 단어…… 이것들을 모아서 연결하면 문장이 나와요. 그런데 이렇게 쓰는 것은 무제한적인 우연적 조합의 놀이거든요. 이런 혐의가 없지 않다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혹은 즐김보다 궁리가 많아져서 고통스런 독서를 강요한다고 항변한다면?
조연호: 감사한 지적입니다. 감성에 의존해 글을 쓰는 방식은 편하고 아늑한 면이 있습니다. 체질적으로도 그게 더 맞고요. 그런데 이번 시집은 상대적으로 해야 할 말이 포함하는 세계가 거대해져서, 한 군데 파묻혀 조용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 건조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정보의 과잉보다는 논리의 과잉이 있어서 감각적인 측면이 줄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고요. 저도 느껴온 고민이었고 쓸 때 고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성과 논리는 양립이 힘들었습니다.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제가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작업 쪽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게 이번 시집의 경우는 여러 면에서 특수한 경우라고 말해두고 싶네요. 애초에 시로 쓰인 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시로 변형되면서도 시가 아닌 무엇이 되기를 바랐고, 감성의 미가 있다면 문학 안에서 사유의 미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점과 함께, 감각적인 표현이 있다면 사유의 감각성 역시 문학 안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전의 텍스트들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농경시』를 이전의 변형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감각성으로, 그 자체 한 계열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김행숙: 조연호 시인의 이번 시집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요, “128절지 정도의 메모지에 낙서를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세어봤더니 열네 장이더군요.” 이 구절을 읽는데 바로 조연호 시인의 초상이 그려졌어요. 조연호에게 글은 조연호의 하루인 것 같아요. 동료로서 바라본 그한테서는 구도자적인 포스가 은근 풍겨요.(웃음) 글쓰기에 있어서의 조연호의 고집, 혹은 고독을 존중해요.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작가의 주관 안에서 완성되는 글쓰기를 단호하게 말할 때의 그 또한 조연호답다고 생각했어요.
조강석: 개념 혹은 기호를 바꿀 수도 있고 아니면 개념이나 기호의 실정성을 변경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천문』에서와 달리 『농경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내러티브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시에서의 작업과는 달리 시집 전체의 내러티브를 신경쓰다 보면 잃게 될 것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특별히 신경을 썼거나 염두에 두었던 것이 있다면?
조연호: 아까 했던 얘기와 비슷한 맥락인데, 서사라고 해봐야 할례 이야기가 가장 큰 줄기고, 그와 다소 동떨어져 있는 다른 가지 중 하나가 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다, 익사자, 난파의 이야기. 대지, 농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처럼 보이겠지만, 의도적으로 넣은 부분입니다. 흙을 파헤쳐 씨를 뿌리고 그 안에서 태동하는 것이 바다에 익몰하여 가라앉음과 동일하다는 인식 아래, 생성이 소멸의 다른 이름임을 말하기 위해 흙과 물을 비유적으로 대비해봤습니다. 한편에서는 허공으로 치솟는 것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끝없이 가라앉는 것으로. 미약하나마 서사가 있기 때문에 관계 설정이 중요해지더라고요. 그게 그냥 등장인물들이면 상관없는데 개념들 사이의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보니 작업 당시에 다소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어떤 색조가, 어떤 개념어가 들어가야 하느냐의 통일된 체계가 필요해져서, 쓸 때 A4 용지에다가 이러저러한 계보들을 도상으로 그려 붙여놓았어요.
첨가해서 얘기하자면, 제가 그린 도상에서 저는 식물성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했어요. 『저녁의 기원』에 ‘이것은 짐승의 언어로 쓰는 나의 농경시’라는 부분이 있는데, 『농경시』는 이 한 연(聯)의 확장판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신에게서 뭇 생명이 내쳐진 불모지 위에서 식물과 동물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두가 신과 분리된 채 짐승, 동물성의 들끓음이 되었을 때, 신만 가지고 있던 모성을 인간의 몸이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연과 이성의 질서가 가능해진 것은 아닐까. 대지가 어머니로 상징되듯, 대지에서 돋아나는 식물 역시 모성에서 나오는 그런 동물성의 들끓음에서 과연 자유로울까. 그런 의문과 더불어 통념적으로 식물적인 것이 수동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혹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입장에서의 무엇이라는 인식 자체가 인간의 기준에 의한 가상일 뿐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간과 신성을 나눌 수 있다면, 생명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동물성에 가까운 것이고 그 동물성 안에서 또한 식물성과 동물성이 나눠지는 것으로 저는 판단했어요. 때문에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식물에 대한 고요하고, 긍정적이고, 인간의 삶과 친화적일 수 있다는 개념이 저에게는 없고, 그 자체가 동물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로 ‘농경’은 식물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동물, 인간의 몸에 대한 얘기입니다.
조강석: 워낙 낱 편의 시를 한 편 한 편 모아놓은 시집이 아니고 전체 틀이 있는 시집이 돼서, 한편으로는 독자들이 이 전체 틀이 갖고 있는 서사가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 시집에 대해 주제론적 접근을 선택할 소지도 많은 것 같아요. 나는 오히려 이 시집을 일종의 하이퍼텍스트적인 텍스트, 그러니까 시집의 어떤 부분으로 입사해도 다른 것들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시집의 어떤 곳으로도 진입할 수 있는 그런 텍스트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서사나 주제에 집중해서 읽는 방식도 물론 있기는 있겠지만 낱낱 문장들의 울림이나 사유의 정밀함과 활달함 등에 두루 매료되어 읽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조연호: 쓰인 지 오래된 텍스트지만, 다시 고치면서, 시로 치환하면서 느낀 점은, 형태를 버리더라도 결국 형태를 말해주는 건 그 글의 통로와 출구라는 것이었는데, 그 점에 조강석 평론가의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장르의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하나의‘책’이 될 수 있는 지점은 그 통로들이 어떻게 얽혀 있고 어떻게 매듭지어지고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좀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형태에 대한 강박이 없는 형태로 말이죠. 이 시집도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어느 정도 터놓고 있지만, 이런 열망은 앞으로 좀더 증폭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앞으로도 계속 ‘시인’으로 불리게 될까요?(웃음) 이제 나한테 시 청탁을 하거나 시집을 내자는 사람은 많지 않겠구나.(웃음)

문예중앙시선을 새로 펴내며

― 편집위원 권혁웅 조강석

시가 언어예술의 정수라는 것은 새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실이다. 시의 시대가 갔고, 그 이후 찾아온 산문의 시대마저 가고, 이제는 영상의 시대라는 데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는 미술과 영상예술의 이미지로, 극예술의 어조로, 음악의 율조로, 그리고 산문예술의 이야기로 빛나는 성과들을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시집이 가장 많이 지어지고 읽히고 계승되는 나라다. 우리는 이 시대 최고의 시들이 한국어로 창작되고 있다는 것, 한국의 시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문예중앙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시집,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풍미했던 시집들 가운데 지금의 독자들에게 내놓아도 그 아름다움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시들을 가려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목차

농경시
해설 향과 재 · 허윤진

저자소개

저자 조연호는 유년기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했고,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재학 중이다. 1994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 『저녁의 기원』(2007), 『천문』(2010)이 있고, 산문집 『행복한 난청』(2007)이 있다. 2009년 제10회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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