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언어로 빚어내는 섬세한 시세계
한우진 시집 『까마귀의 껍질』.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추구하며, 환몽적인 시세계를 섬세한 언어로 나타낸 시집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은밀한 파장, 몸과 마음의 감각들이 섬세한 결을 관찰하고 치밀하게 조형해내는 솜씨가 지극히 실재적이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편!
북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보지 않았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